아침을 여는 예배 (날.기.새)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습니까? (눅 9:18-27)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누구인지 알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 때, 자신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하시는 모습입니다. 앞서 9절을 보면,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헤롯의 질문이었습니다. 아니 그 당시 사람들의 질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수 그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앞선 본문에서 이 질문에 잘 대답해 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말입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 이 사람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기적 사건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헤롯에게 대답하시는 것보다도 그의 제자들에게 더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의 관심은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선지자, 요한, 엘리야라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기적 사건을 보면서 주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으로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양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기 원합니다.
주님의 이런 기도에 베드로가 반응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메시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고백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이 고백을 주님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그렇게 듣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그 고백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 그 실천의 모범을 주님께서 22절에서 보여 주십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을 보여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더불어 주님처럼 몸으로 희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고백은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고백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기 부인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기 부인이 의미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자기 부인은 자기비하나 자기학대, 혹은 자기 포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문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23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자기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성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참된 자기(True self)를 찾기 위해 거짓된 자기(False self)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짓된 자기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님 따라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자기입니다. 이것은 본래 창조된 내가 아니라 타락한 나인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만일 창조된 그대로의 나라면 그런 나는 무엇보다 예수님 따라가기를 즐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내 안에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 어떤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타락한 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를 단호하게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욕심 많은 나요, 충동적인 나요, 이기적인 나인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인생을 살다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사람, 혹은 그런 사건을 가르쳐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혹은 시어머니가 십자가라고, 혹은 속 썩이는 자식들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의 질병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순진한 교우들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니까 십자가 장식하고 돌아다니라는 말인 줄 알고 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어떤 청년 형제가(자매가 아닌)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녀서 "형제님, 십자가는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고 다니는 것이에요" 하니까, "그렇게 하지요"하더니 십자가를 뒤로 돌리면서 "목사님, 이렇게 하면 지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로 가신 이유, 십자가를 지신 이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정직하게 일하다가 동료들에게 고통을 당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탈세하지 않고 정직하게 세금 내다가 망했다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희생과 포기를 말합니다. 주님처럼 죽기까지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재물까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재물과 주님을 비교할 때, 재물이 더 우선적이라면 그 사람은 포기가 안 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믿음,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3.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주님의 행동, 말씀, 모습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처럼 사는 것일까요?
1) 자존심을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존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틀렸을 때 나의 틀림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2) 죄악 된 모습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못된 성품, 못된 습관, 부정적인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버리는 것입니다.
3) 자기 재산이라도 자기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삶입니다.
허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부산에서 변호사이셨으며 노무현대통령과 한 건물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셨던 분입니다. 교회를 건축하게 되자, 그 장로님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자신의 아파트를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부산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했는데 낙선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더 잘 풀렸습니다. 중앙 정부에서 불렀습니다. 장관급 자리인 법률구조공단 이사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다른 장관들은 1년이 멀다 하고 퇴임하였지만, 그 자리에서 오래 일하셨습니다.
자기 것을 포기하자 주님께서 더 잘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이 더 잘되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 받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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